정지선(49)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드디어 ‘뭔가’ 보여주기 시작했다. 재계 3세 오너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이후 대외 활동을 자제하는 그였지만 속으로 만만찮은 내공을 닦고 있었다.
‘은둔의 경영자’로도 불리는 정 회장이 만들어 낸 새로운 유통 모델로 현대백화점그룹은 오는 2030년 매출 4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야심작 ‘더현대 서울’ 공간의 혁신
현대백화점그룹 모태인 금강개발산업은 1975년 서울 강남 개발과 맞물려 유통 사업에 첫 발을 내딛었다. 강남구 압구정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으면서 상가내 슈퍼마켓 운영권을 맡은 게 그 시작이었다.
이후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을 개점하며 유통 전문기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대백화점은 압구정본점을 오픈하며 문화·예술 콘텐츠를 앞세운 ‘문화 백화점 전략’을 선보였다. ‘백화점이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생활문화를 제안하는 곳’으로 바꿔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매장 안에 문화센터와 갤러리, 공연장 등을 선보이는 파격을 택했다. 국내 백화점 중 최초 시도였다. 이 전략은 고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강남백화점 시대’ 서막을 열게 됐다.
당시 후발주자였던 현대백화점을 국내 유통업계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약 40여 년전 파격을 올해 ‘더현대 서울’에서 다시 실행했다. 기존 백화점 틀을 깬 ‘더현대 서울’이 지난 2월 여의도에 오픈한 것이다.
더현대서울은 기획 초기단계부터 많은 염려를 샀다. 입지가 전형적 오피스 타운이라 주말에는 고객이 모이질 않아 백화점 사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백화점들이 고집하던 내부 공간 공식을 혁신하려 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정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점을 결정하고, 공간 디자인과 매장 구성 혁신을 이끌어 미래형 백화점을 제시했다.
더현대서울은 도심 속 자연주의를 콘셉트로 ‘리테일 테라피(쇼핑을 통한 힐링)’ 개념을 적용한 국내 최초 자연친화형 미래 백화점이다.
점포명에 ‘서울’을 넣은 것도 국내 유통업계에서 처음 있는 시도였다. 지하 1층 식품관 이름도 ‘테이스티 서울’로 지으며 서울 시민들에게 미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서울지역 최대 규모인 더현대서울은 파격과 혁신을 핵심 키워드로 공간 디자인과 매장 구성을 차별화한 미래지향적이고 혁신적 백화점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자연친화형 미래 백화점’에 걸맞게 상품 판매 공간을 의미하는 매장 면적을 줄이는 대신, 고객들이 편히 휴식하고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고객 동선을 넓혔다.
창문을 없앤 전통적 백화점과 다르게 모든 층에서 자연 채광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천장은 모두 유리로 제작됐으며, 채광을 위해 천장부터 1층까지 건물 전체를 오픈시키는 건축 기법을 도입했다.
고객들은 이로 인해 1층 매장에서도 햇살을 맞으며 쇼핑을 즐길 수 있다.
특히 1층에는 12m 높이 인공 폭포가 조성된 ‘워터폴 가든’이 있다. 더현대서울 5층을 비롯한 매장 곳곳에는 총 1만 1240㎡ 규모 실내 조경 공간이 꾸며진다. 이중 단연 눈길을 끄는 건 5층에 들어서는 실내 녹색 공원 ‘사운즈 포레스트’다. 천연 잔디에 30여 그루 나무와 다양한 꽃들이 있다.
더현대서울 전체 영업 면적(8만 9100㎡) 가운데 매장 면적(4만 5527㎡)이 차지하는 비중은 51%로, 나머지 절반 가량의 공간(49%)을 실내 조경이나 고객 휴식 공간 등으로 꾸민 것이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더현대서울 영업 면적 대비 매장 면적 비중은 현대백화점 15개 점포의 평균(65%)보다 30%(14%p) 가량 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파격적 시도는 고객들 호응으로 성공적이었음이 증명됐다. 현대백화점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올해 3분기 영업이익 475억 원, 매출액 9248억 원을 각각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6.3%, 67.7% 증가한 수치다. 더현대서울 등 신규점 개장 효과와 소비심리 회복 등이 실적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더현대서울은 오픈 당일에만 50억 원, 개점 후 첫 일요일엔 102억 원 매출을 기록하면서 현대백화점그룹 창립 이후 단일 매장 하루 기준 역대급 실적을 거뒀다. 개점 직후 한달 만에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했으며, 3개월여 누적매출은 약 2500억 원에 달했다.
현대백화점은 이같은 실적 호조에 힘입어 오픈 당시 목표로 잡았던 연간 매출 6300억 원을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통가에서는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이 기록한 최단 기간 1조원 매출을 더현대서울이 깰 것으로 보고 있다.
더현대서울은 세계적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모노클’로부터 ‘최고의 리테일 디자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모노클은 더현대서울에 대해 “리테일 부흥을 이끌 엄청난 프로젝트”라며 “더현대서울은 세계 최고 쇼핑센터가 되겠다는 높은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매우 훌륭하게 디자인 됐다”고 평가했다.
◇ 100년 기업 도약 ‘비전 2030’ 발표
정 회장은 올해 현대백화점 창립 50주년을 맞아 100년 기업으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그는 지난 6월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그룹 50년 역사를 한 줄로 압축한다면 과감하고 열정적인 도전의 연속”이라며 “이제 반세기 동안 축적된 힘과 지혜를 바탕으로 100년 그 이상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이어 “기업의 성장과 사회적 가치 추구가 선순환될 수 있도록 사회공헌과 상생협력 활동을 진정성있게 유지하면서 친환경 가치를 창출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1997년 현대백화점 경영관리팀 과장으로 입사해 실무를 접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3년 현대백화점그룹 총괄부회장 승진, 2007년 12월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정 회장은 이후 대형 인수합병(M&A)을 진행하며 ‘유통, 패션, 리빙·인테리어’를 3대 축으로 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특히 2010년 ‘고객에게 가장 신뢰받는 기업’이 되겠다는 비전을 담은 ‘비전 2020’을 선포하며 유통전문기업을 넘어 ‘종합생활문화기업’으로 재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2012년 국내 여성복 1위 기업 ‘한섬’과 가구업체 ‘리바트(현 현대리바트)’를 차례로 인수하며 패션과 리빙·인테리어 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두 사업 모두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판단에 따른 전략적인 결정이었다.
이후 2017년 ‘SK네트워크 패션부문’까지 추가 인수한 한섬은 디자인 차별화와 노세일 정책 등 프리미엄 전략을 구사하며 국내 대표 패션전문기업 반열에 올랐고, 리빙·인테리어 부문은 2018년 종합 건자재 기업 ‘한화L&C(현 현대L&C)’를 인수하며 업계 선두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이후에도 현대백화점그룹은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 발굴에 적극 나서며 고삐를 바짝 죄었다. 2015년 렌탈 전문기업 ‘현대렌탈케어’를 설립한 데 이어, 2016년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권을 획득하며 면세점 시장에 진출했다.
지난해에는 천연 화장품 원료 1위 업체인 ‘SK바이오랜드(현 현대바이오랜드)’를 인수하며 뷰티·헬스케어 사업 진출의 기반을 마련했고, 올 1월 복지서비스 전문기업 ‘이지웰(현 현대이지웰)’을 인수하며 선택적 복지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꾸준한 사세 확장으로 창립 첫해 8400만 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지난해 20조 원을 달성하며 비약적 성장을 이뤄냈다. 2020년 기준 재계 순위(자산 기준) 21위를 기록했으며, 그룹 전체 부채 비율(2020년 기준)도 48.2%로 안정적 재무구조를 유지해오고 있다.
정 회장은 100년 기업 도약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올초 그룹 미래 청사진을 담은 ‘비전 2030’을 발표했다.
현재 유통, 패션, 리빙·인테리어 등 3대 핵심 사업에 뷰티·헬스케어·바이오·친환경 같은 미래 사업을 더해 2030년까지 매출 40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 상장 계열사 ESG 모두 A등급
현대백화점그룹은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이 실시한 2021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에서 현대백화점·현대홈쇼핑·현대그린푸드·한섬·현대리바트·현대에버다임·현대바이오랜드 등 7개 평가 대상 상장 계열사가 모두 ‘통합 A’등급을 받은 모범 ESG경영 그룹이다.
정 회장은 ‘사회적 가치에 기여하는 회사’를 ‘그룹 사업 목표상’으로 정할 정도로 시대가 요구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가치 창출에 매진하고 있다.
이는 “기업은 규모가 작을 때는 개인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종업원 공통의 것이요, 나아가 사회, 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경영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2006년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백화점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해 계열사별로 진행하던 사회공헌활동을 그룹 차원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파랑새를 찾아 희망을 찾아’라는 슬로건을 통해 시회공헌활동을 ‘아동복지사업’ 위주로 재편했으며, 미래 세대 주역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2017년에는 사회공헌의 범위를 기존 아동 외에 여성으로 확대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사회공헌 모델은 지난해 유엔(UN)의 ‘공식 의견서’로 채택되는 쾌거로 이어졌다.
환경부문에서도 각 계열사 특성을 살린 친환경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 2015년부터 고객으로부터 기부받은 헌 옷·잡화를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재판매해 수익금을 초등학교 교실 숲 지원 사업 등에 기부하는 현대백화점 ‘라이프 리사이클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홈쇼핑은 지난 2018년부터 고객이 수거를 신청하면 택배업체가 아이스팩을 가져가는 ‘아이스팩 재활용 캠페인’을, 한섬은 올해부터 재고 의류를 업사이클링해 친환경 인테리어 마감재로 만드는 ‘탄소 제로 프로젝트’를 각각 전개하고 있다.
지배구조 부문도 올초 최고경영자 승계 정책 수립 등 지배구조 관련 규정을 명문화하고, 이사회 중심 경영과 사외이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향후 100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기존 사회(S)·환경(E) 분야 위주 사회적 가치 창출 노력을 ‘ESG 경영’으로 확대, 강화해 나갈 방침이다.
이와 관련 현대백화점은 최근 ESG 경영 강화를 위해 이사회 산하에 ‘ESG 경영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사내에 대표이사 직속 ESG 추진 협의체도 신설했다.
현대백화점그룹 관계자는 “ESG는 각 계열사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경영의 중요한 축”이라며 “앞으로도 고객에게 가장 신뢰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 보다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ESG 경영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투명하고 선진적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환경 및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덧붙였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