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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바람’에 밀려…근대건축물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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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주 등 역사적 건물 수백곳
소유주가 철거 땐 보존 방법 없어
인천 중구 선화동 8-2(조일양조장·1939~2012년), 송월동2가 4(애경사·1912~2017년), 신포동 19-2(동방극장·1938~2015년), 신흥동1가 34-29·34-34(오쿠다정미소·1930년대 건립 추정~2020년), 만석동 47-9(신일철공소·1974~2019년)….
근대건축물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계를 이용해 소주를 생산하던 ‘조일양조장’과 첫 비누공장 ‘애경사’, ‘동방극장’은 주차장이 됐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이었던 ‘오쿠다정미소’는 지난해 철거됐다. 이곳엔 오피스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전통 방식으로 나무배를 만들던 대장장이 고 박상규 장인의 대장간 ‘신일철공소’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인천은 근대건축물이 밀집한 도시다. 개항장이 있어 근대문물 유입이 빨라 개항기부터 산업화 시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건축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천에 근대건축물이 몰려 있는 곳은 개항장과 인접한 중구와 동구다.
2019년 인천시 조사 결과를 보면 중구에 195개, 동구에 59개 등 총 254개 건축자산이 있다. 이는 인천지역 전체 492개 건축자산 중 52%를 차지하는데, 이 중 근대건축물은 중구(153개)와 동구(47개)에 200개가 몰려 있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을 통해 자본이 들어오면서 이 주변에 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부대시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들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노동·역사적 의미가 더해져 가치 있는 건축자산이 되었다.
1930년대 세워진 동일방직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군수공장으로 설립되어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수탈의 현장이다. 특히 국내 최초의 노조 여성지부장이 탄생한 한국 노동운동의 산실로도 평가받는다. 이 공간은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에 등장하는 대동방적공장의 모델이다.
1978년에는 이곳에서 여성노동자들을 탄압한 일명 ‘똥물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회사의 탄압을 피해 대피한 곳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다. 동일방직은 2014년 생산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면서 2017년부터 폐쇄된 채 방치돼 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61년 지어진 근대건축물이지만, 현재 재개발지구에 포함돼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1일 ‘2021년도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 10곳을 선정하면서 인천지역의 경우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미림극장, 조병창 병원 등을 꼽았다. 이희환 인천도시공공성네트워크 공동대표는 “근대건축물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는 것”이라며 “근대건축물을 보호하지 않으면 결국 아파트만 들어선 개성 없는 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체는 ‘보존 대신 개발’
인천 개항장 옆 중·동구에 200개
일제의 노동수탈 상징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보듬은 ‘산업선교회’
역사적 가치 높은 건축물들 밀집
시, 원도심 재생 위해 ‘개발’ 추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축 예정
다수 건축물 철거 위기에 내몰려
인천의 대표적 근대건축물로는 일제강점기 일본 기업 공장에서 출발한 일진전기 공장도 있다. 1938년 화수동 매립지에 들어선 이 공장은 전기 관련 용품을 생산하던 도쿄시바우라(도시바) 제작소 소유였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1년 앞둔 1944년 군수회사로도 지정된 곳이다.
이 공장 사무동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간회사 사옥 건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구에는 후카미 도라이치 단무지 공장 직원 기숙사도 있는데, 민간이 운영하던 공장의 숙소여서 연구 가치가 높다는 게 학계 안팎의 설명이다.
장회숙 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조선 후기 서구 열강들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머물던 화도진지가 있던 화수동과 개항 이후 간척사업이 진행된 만석동 일대는 1900년대 초반 일본과 한국 자본이 첨예하게 부딪쳤던 곳”이라며 “대부분 기록이 사라졌지만 한국과 일본 간척회사들이 다퉜던 법원 기록 등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개항 이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던 공장들은 대부분 만석동 일대에 집중돼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근대까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라며 “동일방직 일대에는 다카스키 양조장을 비롯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근대건축물이 있는데 조사와 연구를 통해 가치를 발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근대건축물 보존과 개발을 놓고 시민단체와 지자체가 대립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조사를 요구하고 있지만, 지자체는 개발 위주의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인천시는 대규모 공장 이전 용지를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해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인천시는 동일방직·혁진산업·동아원 등 만석동 일대 17만6331㎡ 부지는 만석지구로, 화수동 일진전기 일대 7만4169㎡ 부지는 화수지구로, 송림동 일대 24만7389㎡는 송림지구로 지정했다. 동구 일대 총 49만8000㎡ 부지에는 건축물 등을 허물고 아파트를 지을 예정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도 화수·화평 재개발지구에 속해서다.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철거를 막기 위해 지난 7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4일 현재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은 125일째 릴레이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지자체가 근대건축물 보호보다 개발을 택하는 이유는 원도심 개발과 인구유출 등 당장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어서다. 동구는 한때 인구 18만명이 살던 인천의 중심도시였지만, 인구유출이 계속됐다. 현재 인구는 6만명에 불과하다.
이희환 공동대표는 “공장을 이전하면서 소유주는 빈 공장의 용도변경을 통해 아파트를 짓고 개발이익을 취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공동대표는 “지자체 입장에서도 원도심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손쉽게 부동산 개발을 하고 인구를 유입시킬 계기를 마련하는 등 일석이조의 정책”이라며 “이런 사업이 계속되면 근대건축물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자체가 나서 철거 위기에 놓인 건축물을 보존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인천시도 근대건축물을 포함한 건축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달 근대문화유산 관리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지만, 현재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민간 소유이기 때문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보존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물은) 대부분 민간이 소유하고 있어 철거나 훼손을 막는 데 어려움이 많다”며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존 쉽지 않은 민간 보유 근대건축물
근대건축물 대부분이 민간 소유
개발 목적 철거해도 제재 못해
지자체 지원으로 재정비해도
몇 년 지난 후에는 개발 가능해져
정부 ‘건축자산법’ 시행했지만
지자체 자산 등록 등 참여는 미미
“한정된 인력·예산에 관리 손놔
정부가 전문가 파견 등 지원해야”
민간 소유 근대건축물을 보존하는 데 장애물도 적지 않다. 특히 부지 소유자들이 개발을 위해 해당 건축물을 철거하더라도 지자체가 막을 방법이 마땅찮다.
광주시는 2002년 근대문화유산 현장조사를 통해 주요 근대건축물 100곳을 찾아냈다. 이 중 14곳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11곳은 기념물 등 문화재로 지정했다. 하지만 보존 가치가 높은 상당수 건축물은 당시 조사 이후 철거됐다. 지난해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근대건축물 20곳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철거된 건물 중에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회사 건물이나 개인 주택 등도 있지만 공공기관이 소유하고 있던 건축물도 상당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지어진 옛 전남경찰청 민원실을 비롯해 1935년 건축된 수피아여중 특별교실, 1956년 만들어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본관, 1960년대 지어진 동곡초등학교 급식동과 하남초등학교 유치원이 헐렸다.
민간이 소유한 조흥은행 충장지점(1962년), 스카우트 광주·전남연맹(1940년대), 뉴 계림극장(1953년), 현대극장(1961년), 송정극장(1960년) 등도 철거됐다. 대신 이 자리에는 아파트와 오피스텔, 상가 등이 새로 올라갔다.
대구에서는 중구 북성로와 서성로 등을 중심으로 근대건축물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대구 중구는 근대건축물 보호를 위해 2014년부터 보존 가치가 높은 1960년대 이전 건축물의 외부경관 개·보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까지 건물 1채당 최대 4000만원, 총 14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 근대건축물 35채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새 옷’을 입은 건축물 중 4채가 아파트 재개발로 자취를 감췄다.
대구 중구 관계자는 “개·보수 지원 대상이 된 건축물은 건물 주인이 5년 동안 외형을 바꾸거나 팔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면서 “아파트 재개발 시행사에 건물을 판 이들이 받았던 지원금(1억2800만원)은 환수조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자체 지원을 받아 재정비했더라도 5년이 지나 신축 아파트 부지 등 개발지역에 속할 경우 철거를 막을 방안은 없다.
대전 동구 소제동에서는 100년에 걸쳐 형성된 철도관사촌도 사라지고 있다. 철도관사촌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대전역이 건설된 이후 생겨났다. 대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 관사촌에는 관사 100여채가 있었지만, 최근 도로 개설이나 지역 개발사업 등으로 10여채가 철거됐다. 일부 건물은 카페나 식당으로 개조되면서 원형을 잃고 있다.
우수건축자산 있는 지자체는 2곳이 전부
건축자산을 지키기 위한 전국 지자체들의 노력은 미흡하다. 각 지자체는 2015년 정부의 ‘한옥 등 건축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건축자산법) 시행에 따라 건축자산 진흥 시행계획을 수립한 뒤 건축자산 기초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예산과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수건축자산과 건축자산진흥구역 지정에 소극적인 게 현실이다.
경향신문 조사 결과 전국 17개 지자체 중 울산을 제외한 16곳이 건축자산 진흥 시행계획을 수립했다. 이들 지자체는 건축자산법 시행에 따라 건축자산 기초조사를 마쳤거나 시행 중이다. 그러나 우수건축자산과 우수공간환경을 등록한 지자체는 서울과 경기 등 2곳뿐이다. 서울은 체부동 성결교회 등 11곳을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했다. 경기는 화성시 매향 쿠니사격장을 우수공간환경으로 지정했다. 다만 인천은 내년 7월까지 용역 결과를 토대로 우수건축자산을 등록한다는 계획이다.
전국에서 건축자산진흥구역을 지정한 지자체도 4곳에 불과하다. 건축자산진흥구역은 각 지자체가 근대건축물 등 건축자산이 밀집된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심의를 거쳐 지정한다. 서울이 북촌 등 9개 구역을 지정했고, 대구는 약령과 달성토성을 지정했다. 대전은 동구 이사동을 건축자산진흥구역으로 정했다. 전남은 지난해 금성관, 나주향교, 나주읍성 서성문 등이 밀집된 나주 과원동 일원을 건축자산진흥구역으로 지정해 관리에 나섰다. 인천은 중·동구 개항장 산업유산 지역과 개항기 근대건축물 밀집지역을 건축자산진흥구역으로 지정하기 위해 용역을 진행 중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우수건축자산은 건축물 소유주가 신청해 심의를 거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건축주가 신청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건축물이어도 우수건축자산 등록이 힘들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자체의 한정적인 예산과 인력으로는 건축자산 관리가 힘든 상황”이라며 “대부분 지자체들이 이 같은 이유로 우수건축자산과 건축자산진흥구역을 지정하는 데 큰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대건축물 보호를 위해선 정부 예산과 전문인력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근대도시건축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각 지자체가 건축자산 조사를 하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에 따라 조사 내용이 천차만별일 것”이라며 “지자체 예산·규모 등에 따라 전문가 확보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정부가 나서 예산을 지원하고 등록건축물 조사·관리를 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파견하는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1102506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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