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전필립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사업구조, 사업방식, 조직문화를 혁신하는 이른바 파라다이스 웨이(paradise way)를 선포하는 행사를 열고 이같이 밝혔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인 작년은 파라다이스그룹이 설립되고 나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매출은 54% 감소한 4539억원, 영업손실은 862억원을 기록했다.
전 회장은 창업주이자 국내 카지노 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고(故) 전락원 창업주가 2004년 별세한 이후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파라다이스는 전락원 창업주의 영향력, 정부 규제로 진입장벽이 높은 카지노 산업의 폐쇄성, 업계에서 축적한 운영 노하우 등으로 무려 49년간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독·과점하고 있다. 2010년 전후로 면세점, 소방 기구 제조업 등 비(非)주력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2017년 복합리조트를 개장하며 호텔·카지노 분야 경쟁력을 강화했다.
전 회장과 파라다이스그룹을 두고 부친의 유산을 토대로 사업 규모를 확대했다는 평가와 지나치게 가족 중심의 지배구조 체계를 확립했다는 비판이 엇갈린다. 전 회장은 개인회사였던 파라다이스글로벌을 주력 계열사인 파라다이스와 기타 계열사를 지배하는 지주회사로 만들었다. 전 회장과 세 자녀가 파라다이스글로벌 지분을 87.43% 보유하고, 파라다이스글로벌은 파라다이스 지분 38.23%를 갖고 있다. 전 회장의 부인 최윤정 이사장은 2013년부터 파라다이스문화재단을 이끌고 있다.
◇ 72년 워커힐호텔 운영권 인수 후 外人 카지노 1위 독주
전락원 창업주는 1960년대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한 운수 사업에 종사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사교성이 좋은 그를 눈여겨본 유화열 당시 인천 올림포스호텔 대표가 호텔 경영에 참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적자에 허덕이던 올림포스호텔은 1967년 당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국내 최초로 외국인 전용 카지노 개설을 허가받는다. 이와 관련해선 인천을 방문한 박 전 대통령이 외국인 VIP에게 인기라는 올림포스호텔을 찾았다가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 이후에 유 전 대표와 전 창업주가 요청한 카지노 사업 허가를 흔쾌히 수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텔 정문에는 박 전 대통령의 기념 식수가 남아 있다.
외화벌이가 급했던 박정희 정권은 1961년 서울 워커힐 호텔 건립에 착수했고 1962년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를 설립해 워커힐 호텔을 맡겼다. 국제관광공사는 호텔 내 카지노 운영을 전 창업주를 비롯한 올림포스호텔 직원에게 맡겼다. 그러나 워커힐 카지노는 연평균 객실 회전율이 1970년 44.4%에 그치는 등 수익성이 떨어졌다. 정부는 카지노 운영 경험이 없는 공기업에 경영을 맡긴 것이 원인이라고 보고 민영화를 결정, 1972년 선경그룹(SK그룹의 전신)에 워커힐 호텔을 매각했다.
선경은 당시 호텔, 카지노 사업 경험이 전무했다. SK그룹의 ‘60년사’에 따르면 고 최종건 선경그룹 회장이 정부의 민영화 계획을 사전에 입수해 다른 기업이 제안한 19억5000만원보다 높은 가격에 일시불로 인수하겠다고 제안했고 박 전 대통령이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인수가는 27억원이었다. 매각 과정에 당시 실세이자 최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후 최 회장의 막내딸 최예정 씨와 이 전 부장의 5남 이동욱 씨가 결혼하며 두 사람은 사돈관계가 됐다.
전 창업주는 1972년 유화열 대표가 가지고 있던 워커힐 카지노 운영권을 인수한 데 이어 1978년에는 선경그룹으로부터 허가권(사업권)까지 넘겨받는다. 정부는 지역 관광 활성화 목적에서 1970년대부터 전국 각지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 개설을 허가한다. 1971년부터 1991년까지 서울, 부산, 강원, 제주, 경주, 충북에 11개 카지노가 잇달아 문을 열었다. 1993년 당시 파라다이스그룹은 ▲워커힐 ▲부산 파라다이스비치호텔 ▲제주 그랜드호텔 ▲파라다이스 카지노 롯데 ▲코오롱 관광호텔 카지노 등 5개를 소유했는데, 당시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했다. 나머지 8개는 ▲동아관광개발 ▲한일합섬 ▲전원산업과 개인 사업가 등이 소유했는데 모두 수도권 밖에 위치해 매출 비중이 작았다. 파라다이스그룹은 2018년에 롯데관광개발에 카지노 하나를 매각해 현재 4개를 운영 중이다.
파라다이스그룹은 서울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보유한 유일한 사업자 지위를 정부가 그랜드코리아레저(GKL)를 설립한 2005년까지 유지한다. 정부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여러 업체에 허가 내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제주도의 경우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8개가 있는데 절반이 적자인 점을 고려한 것이다. 카지노 업체들이 방한 외국인이 아니라 전문 도박사들에게서 돈을 버는데, 카지노 사업장이 늘어날수록 매출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도 제기됐다. 정부가 사행산업을 권장하는 듯한 대외 이미지를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종교단체, 시민단체 주장도 있었다.
일각에선 전 창업주가 정·관계에 막강한 비호 세력을 구축해 독점적 지위를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특혜 논란을 제기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검찰은 파라다이스가 카지노 수익금을 빼돌려 세금을 포탈하고 4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수사했다. 검찰은 전 창업주가 정·관계에 비자금을 제공했을 것으로 의심했고 전방위적인 수사를 벌였으나 비자금의 사용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전 창업주는 3년간 해외에 머물다 1996년 입국, 1997년 1심에서 세금 포탈과 횡령, 재산 해외 도피죄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듬해 광복절에 사면됐다.
GKL이 2006년 서울 강남과 중구 힐튼호텔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문 연 2006년 파라다이스의 매출은 12% 감소한 3034억원으로 줄었고 영업이익은 633억원에서 223억원으로 3분의1 토막 났다. 그러나 작년 기준 파라다이스는 국내 외국인 전용 카지노 업계에서 매출 기준 62%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30%대인 GKL에 크게 앞서고 있다. 파라다이스의 서울 카지노는 광진구에 있어, GKL 대비 입지적 장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에선 사기업인 파라다이스가 공기업인 GKL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선 영향이 주효했다고 본다. 2010년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해외여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파라다이스가 현지에서부터 서울 카지노 영업장까지 고객을 직접 모셔 오는 서비스를 도입했다. 파라다이스를 찾는 중국인은 2005년까지만 해도 25.6%였으나 2010년에 55.8%까지 늘었다.
◇ 전필립 회장과 세 남매, 파라다이스글로벌 통해 회사 지배
전 창업주가 아들인 전필립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줬듯, 전 회장도 3세들의 승계 기반을 일찍이 닦았다. 파라다이스그룹의 지배구조는 전필립 회장 일가→파라다이스글로벌→파라다이스로 이어진다.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파라다이스글로벌은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부산 카지노 사업을 담당하는 전 회장의 개인회사였다. 그러나 2004년 전 창업자가 보유한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산업, 파라다이스제주 등 지분을 증여하며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전 회장은 2005년 인천 카지노를 운영하는 파라다이스인천 지분을 세 자녀 전우경·동혁·동인 씨에게 20%씩 넘겼다. 당시 만 10세 이하였던 세 사람은 그룹 계열사의 어린이 주주가 됐다. 2011년 파라다이스인천이 파라다이스글로벌에 흡수합병되면서 세 남매가 지주사 지분을 총 20.10% 보유하게 됐다. 현재 전 회장과 세 자녀의 파라다이스글로벌 지분율은 87.43%에 이른다. 전 회장의 세 자녀는 아직 경영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은 2012년부터 파라다이스글로벌이 영위하던 면세점, 소방 기구 제조업 등을 외부에 매각하며 현금을 확보했다. 이 자금은 2017년 개장한 인천 영종도 복합리조트 파라다이스시티 건립 등 신규 사업에 활용했다. 파라다이스시티에는 카지노와 호텔뿐 아니라 컨벤션센터, 쇼핑몰, 스파, 갤러리가 입점하는 등 총 투자 규모가 1조5000억원에 달했다. 부채비율은 2016년 연결 기준 76.2%에서 올해 3월 기준 132.3%까지 상승한 상태다.
류연주 한국신용평가 애널리스트는 “외래 방문 VIP를 주요 고객기반으로 하는 카지노 사업의 고객 유치가 어려운 상황이 올해까지 지속할 것”이라며 “2022년부터 영업실적 개선이 가시화돼 2023년에는 2019년 수준의 매출 외형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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