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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 가속’ 수도권 ‘소멸 직전’ 지방, 두 번째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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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2년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했고, 2003년 출범한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통해 공공기관 지방 이전, 혁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기업정책은 거꾸로 갔다. 2006년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령을 풀어 경기 파주에 LG디스플레이 공장을 짓도록 허용했다.
이명박 정부는 본격적으로 수도권 공장 신증설 규제의 빗장을 해제했고, 박근혜 정부는 수도권 규제 대상에서 접경지역(경기 북부)을 뺐다. 문재인 정부도 해외에서 국내로 귀환하는 제조기업의 입지 제한을 풀었다. 균형발전 명목으로 재정 지출은 늘렸지만 정작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들의 수도권 집중은 정부가 방치·조장한 것이다.
2010년대 중반 ‘4차 산업혁명’의 구호가 등장하자 ‘비수도권 제조공장, 수도권 연구·개발’이라는 공간분업의 마지노선도 허물어졌다. SK하이닉스가 2019년 경기 용인에 반도체클러스터를 짓기로 한 것은 결정타였다. 그 결과 판교, 기흥에는 DMZ 못지않게 삼엄한 ‘취업 남방한계선’이 그어졌다.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은 지방의 자강(自彊)을 막는 ‘분할통치’였다. 예산을 쥔 중앙정부가 공모사업을 통해 지자체를 길들이고, 경쟁을 부추겼다. 지역 나눠먹기식 혁신도시 지정 탓에 투입재정 대비 효과는 미미했고, 균형발전은 ‘예산 잡아먹는 하마’라는 편견만 커졌다.
남북 분단보다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두번째 분단’이 이제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 됐다. 주거, 취업을 비롯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이 이 모순과 연관돼 있다. 판교와 강남은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지만 지방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농어촌은 ‘소멸’위기에, 지방 제조업 도시들은 ‘러스트벨트’화될 조짐이 뚜렷하다. 청년들은 일과 기회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들지만, 취업·주거난에 결혼도 출산도 엄두를 못 낸다. 그런데도 정부는 집값이 폭등하는 수도권에 국비 십수조원을 들여 광역급행철도(GTX)를 건설하고 있다. 균형발전의 허울 아래 수도권 팽창정책은 가속화하고 있다. 경향신문 기획취재팀은 위기에 빠진 ‘절반의 한국’ 비수도권의 실태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수도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지방의 현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색들을 살펴봤다.
판교라는 ‘남방한계선’
사무직은 ‘판교라인’기술직은 ‘기흥라인’이 취업 마지노선
“판교 직장인들의 중고거래 서비스로 출발했으니 판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처음엔 판교테크노밸리에 공간이 없어 백현동 카페거리 상가 2층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1층 고깃집의 냄새를 맡으며 1년 반 동안 있었어요. 함께 고기를 굽다 첫 투자 연락을 받았는데 그날 고기 맛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남 삼평동 판교테크노밸리
강남서 가장 가까운 산업단지
‘일+삶터’ 2009년 첫 기업 입주
테헤란밸리 IT 기업들 건너오며
‘한국판 실리콘밸리’ 위상 굳혀
중고거래가 ‘국민앱’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지역기반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은 창업 6년 만에 누적 가입자 2100만명에 추정 기업가치 3조원의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용현·김재현 공동대표가 카카오에서 일할 당시 사내 장터에서 착안한 서비스다. “게시판에 중고물품 거래글이 올라왔는데 반응이 뜨거웠어요. 물건이 좋고 가격도 쌌거든요. 사내 거래다보니 믿음도 갔고요.” 정우람 당근마켓 서비스부문 총괄(40)은 당근마켓 6번째 창업 멤버다. “판교신도시가 ‘핫하다’는 이미지가 있어 입소문을 타니 분당, 죽전으로 금방 퍼져나가더라고요.”
창업 초기에는 지방·서울 차이 없지만
성장단계에선 인재 확보가 최우선
개발자가 중시하는 것‘뛰어난 동료’
지난 8월 당근마켓은 1789억원의 시리즈 D 투자(스타트업 성장 단계에 따라 시드머니로부터 시리즈 A·B·C·D로 구분)를 유치했다. 임직원 6명은 200여명으로 늘었다. 취업준비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네카라쿠배당토(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당근마켓·토스)’에도 이름을 올렸다. 당근마켓의 현주소지는 강남 교보타워. 지난 8월19일 정씨와 만난 11층 사무실 창문 너머로 강남역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안락한 라운지에는 편의점 못지않게 군것질거리가 채워져 있다. 간식·식대 무제한, 자유로운 복장과 자율적 근태, 영어 닉네임으로 소통하는 조직 문화까지 스타트업의 전형이다. “개발자들은 뛰어난 동료를 특히 중시해요. 당근마켓은 인재의 밀도도 매우 높다고 자부합니다.” 비싼 임대료를 감수하고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강남이 사람을 뽑기 제일 수월해요. 판교만 해도 서울 강북이나 인천이 집이면 출퇴근이 어렵잖아요.” 인재와 자본, 인프라가 몰려있는 수도권, 그중에서도 강남과 판교 말고 어디냐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창업 초기에는 지방과 서울 차이가 없겠지만, 성장 단계에선 인재 확보가 최우선이거든요.”
‘스타트업 수도’ 판교
신분당선 강남역에서 판교역까지 이동 시간은 14분. 강남 한복판을 출발해 청계산 터널 구간의 어둑함에 익숙해질 때쯤 판교역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1번 출구로 나오면 판교 테크노밸리. 네이버와 카카오가 입주한다는 초대형 오피스빌딩이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판교테크노파크공원에는 번쩍이는 유리 빌딩들이 곧은 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다. 컴퓨터그래픽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도시 공간에 반팔티,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느긋하게 오가는 직장인들이 ‘판교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고연봉 IB·컨설팅社도 싫다…‘인재 피라미드’ 맨 위에 스타트업”. 최고 직장으로 꼽히는 투자은행과 컨설팅회사에서 ‘판교’로 이직하는 흐름을 알리는 기사 제목이다. 창의적 업무 분위기에 성장 가능성, 수억·수십억원에 달하는 인센티브가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판교의 성공요인을 꼽자면 우선 지리적 장점이죠. 강남에서 가장 가까운 산업단지잖아요. ‘워라밸’을 추구하는 젊은 연구 인력들이 판교 아래로는 안 가려고 해요. 가족이 있으면 더 그렇고요.” 판교테크노밸리를 지원하는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연도현 팀장은 허허벌판이던 지난 10년 전부터 판교의 성장을 지켜봤다.
굴지의 대기업과 그 계열사 등
1697개 기업 매출액만 109조원
임직원 7만여명 중 2030이 63%
578억이던 판교공영주차장 부지
13년 만인 올봄 8377억에 매매
‘대장아파트’도 30억 잠실 수준
“초창기에 한국파스퇴르, GE 등 앵커 기업을 유치한 것이 기틀을 잡는 데 긴요했습니다. 판교 1700개 기업 중 대기업은 60여개입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연구·개발(R&D) 협력이 쉽게 이뤄지죠. 공공기관, 관련기업, 투자사 등이 밀집해 있으니 하루에 몇번이고 사람들과 업무미팅을 잡을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직업의 지리학>을 쓴 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가 강조하는 ‘집적효과’가 판교에서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집적효과는 우수 인재들이 밀집해 있으면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큰 혁신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모레티가 미국 320개 대도시 노동자 110만명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첨단기술 일자리가 1개 생기면, 부수적 일자리 5개가 창출된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까닭이자, 세계 주요 도시들이 집값 상승·교통 체증 등 부작용에도 사람과 기업을 모으려는 이유다.
성남시 삼평동 판교테크노밸리는 2기 신도시인 판교신도시의 첨단산업단지로 조성됐다. 베드타운에 그친 1기 신도시와 달리 일터와 삶터를 합친 공간으로 짜였다. 2009년 첫 기업이 입주했고, 2015년 핵심 지원시설인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가 문을 열며 사업이 일단락됐다. 강남 테헤란밸리의 IT기업들이 건너오면서 ‘한국판 실리콘밸리’ 위상을 굳혔다. 첨단 제조업이 자리 잡은 경기남부권과도 가까운 입지 조건은 판교의 매력을 높였다.
‘2021년도 판교테크노밸리 입주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입주기업 수는 1697개로 대기업 64개(3.8%), 중견기업 97개(5.7%), 중소기업 1487개(87.6%), 공공기관·협회 49개(2.8%) 순이다. 삼성·SK·한화·포스코 등 대기업의 계열사, 안랩·한글과컴퓨터 등 소프트웨어 업체, 카카오·엔씨소프트·넥슨·스마일게이트·네오위즈·NHN 등 게임업체들에 SK바이오팜·차병원그룹 등 바이오기업이 입주했다. 이들의 매출 합산액은 109조9000억원. 임직원 7만1967명 중 20~30대가 3분의 2에 이른다.
판교의 위상은 부동산에서도 확인된다. 2008년 578억원에 성남시에 팔렸던 판교공영주차장 부지가 올봄 엔씨소프트 제2사옥 부지로 8377억원에 매매됐다. 올여름 판교 ‘대장아파트’라는 판교푸르지오그랑블 집값이 30억원대로 잠실 대표단지 잠실엘스를 넘어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집값이 제자리걸음하며 뒷자리 ‘0’ 하나가 차이나는 지방 도시에선 별천지 같은 이야기다.
“지난해부터 10년 전매제한이 풀리면서 기업들이 판교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왔지만, 지금도 공간이 부족해 2판교, 3판교 테크노밸리를 만드는 형편입니다.” 국내 자치단체부터 해외 개발도상국까지 매년 수백명이 판교를 찾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물론 ‘어떻게 제2의 판교를 만들 것인가’이다. “대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을지, 특화 산업을 만들어낼지가 관건 아닐까요.”
고삐풀린 ‘수도권 집중’
판교의 성공은 ‘4차 산업혁명’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흐름과도 맞물린다. 10여년 전부터 대기업 인사담당자 사이에선 ‘취업 남방한계선’이라는 조어가 등장했다. ‘명문대를 졸업했거나 우수한 스펙의 취업준비생들이 양재·기흥 이남 근무를 기피한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사무직은 판교까지만 간다고 ‘판교라인’, 기술직 엔지니어는 용인시 기흥이 마지노선이라고 해서 ‘기흥라인’이다. 화성 현대차 남양연구소, 평택 삼성반도체클러스터도 기흥라인에서 멀지 않다.
“대기업 지방 근무직은 면접 때 애인이 있다고 하면 뽑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지도 꽤 됐다. 지방근무를 1년도 못 버티고 퇴사한다는 것이다. 정착하기에는 수도권과 교육, 문화 격차가 크다는 게 기피 사유다.
2008년 수도권 규제완화에 물꼬가 트이면서 수도권 집중에 드라이브가 걸렸다. 국내 30대 그룹 중 등기상 본사가 지방인 기업은 포스코(경북 포항), 현대중공업(울산), 카카오(제주), 하림(전북 익산) 4개뿐이다.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SK케미칼, 한화테크윈 등은 이미 판교로 R&D 기능을 옮겼다. 본사와 공장이 경기 이천으로 ‘기흥라인’ 외곽이던 SK하이닉스가 2019년 120조원 규모의 공장을 용인에 짓기로 한 것은 결정타였다. 연구소뿐 아니라 대기업의 제조 공장마저 지방을 떠나 수도권으로 향하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판교, 기흥에는 DMZ에 버금가는 ‘취업 남방한계선’이 그어졌다. 수도권이 부풀어 오르며 최근엔 ‘수청권(수도권+충청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제조업 공장들이 경기도 접경인 충청도 북부를 따라 입주하며 수도권의 자장에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의 시야에서 보면 비수도권이 새롭게 성장하는 대신 수도권이 ‘불건전한’ 팽창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리쇼어링(제조기업 본국 회귀) 촉진을 위해 국내 복귀 기업에 수도권 부지를 우선 배정하고, 수도권에도 첨단산업이나 연구·개발센터가 옮겨오면 새롭게 각종 혜택을 주기로 했다. 한국의 거의 전 산업을 수도권에 몰아넣을 기세다.
수도권 블랙홀, 공장마저 빨아들이며 ‘수청권’ 비정상적 팽창
국토연구원의 2019년 기업 28만4424곳 분석 결과 연구·개발비 지출을 통해 고용·매출 성장을 함께 달성한 ‘혁신성장기업’은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 남부에 몰려 있었다. 남방한계선은 경기도와 인접한 천안 북구였으며, 서쪽은 안산 반월, 동쪽은 성남 중원 사이에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이를 스타트업으로 좁히면 수도권 집중은 더욱 두드러진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2019년 스타트업 주소 분석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10억원 이상 투자를 받은 575개 스타트업 중 90%가 수도권, 80% 이상이 서울, 절반이 강남구·서초구, 3분의 1이 테헤란밸리 부근에 있다. 강남-판교-지방으로 이어지는 위계가 뚜렷하다.
2008년 수도권 규제완화 ‘물꼬’
SK하이닉스 용인 공장 건설은
수도권 쏠림 현상 ‘결정타’ 역할
2012년 설립된 카카오벤처스는 ICT 및 소프트웨어 기업에 투자하는 초기 투자 전문 벤처캐피털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일하다 2018년 합류한 장원열 수석 투자심사역(37)은 투자 기준에 대해 “학력이나 스펙보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실행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왓챠, 두나무, 당근마켓 등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들이 카카오벤처스 투자를 받았다. 9월 기준 누적 투자 기업은 205곳에 투자 금액은 3400억원이지만 지방 소재 스타트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주소지는 상관없어요. 좋은 기업인데 지방이라고 투자 안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방은 스타트업 숫자 자체가 적은 데다 수도권으로 옮겨온 곳도 많다. “모든 스타트업의 문제는 인력 확보입니다. 스타트업은 빠르게 몸집을 키워야 하니 인재 수요가 많고, 인력 확보에 가장 좋은 곳이 서울인 거죠. 한번에 30~40명씩 뽑느라 하루 종일 대표님이 면접만 본다는 회사도 있으니까요.”
혁신성장기업 대부분 수도권에
경기도 접한 천안, 한계선으로
10억원 이상 투자받은 스타트업
90%가 수도권에…집중 더 심해
‘빨리 몸집 키우기’ 과제 풀려면
인력 밀집 지역서 시작해야 유리
벤처캐피털과 액셀러레이터(투자와 보육을 함께하는 전문회사)들 역시 테헤란밸리에 몰려 있다. “요즘은 서울 성수동에도 스타트업들이 많아요. 판교 기업들은 이미 대기업이 됐잖아요. 초기 스타트업을 위한 공유오피스는 오히려 강남에 많죠.”
카카오벤처스가 있는 판교메리어트호텔을 나오면 리치투게더센터라는 인상적인 이름의 건물과 마주친다. 이곳에 자리 잡은 부스트이뮨은 면역항암제를 개발하는 바이오스타트업이다. 지난 2월 창업한 이광희 대표(48)의 롤모델은 197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한 세계 최초 바이오텍 제넨텍이다. “바이오텍은 연구자 출신 창업자들이 아이디어만으로 투자를 받아 성장해나가는 기업입니다.” 이 대표 등 3명이 근무하는 공유오피스에는 컴퓨터와 책상만 놓여 있다. 실험기구로 가득한 연구실과는 딴판인 ‘드라이 랩(Dry Lab)’이다. 자료를 분석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만드는 사고 실험 공간이다. 부스트이뮨은 외주 실험을 통해 약물을 설계하는 단계다.
이런 공간이라면 판교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판교는 벤처캐피털이 있는 강남과 대형 제약사들이 있는 경기남부권 사이에 있어 최적의 장소죠. 스타트업은 인력이 적은 대신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기업에 있다가 창업하는 경우가 많고, 경험 있는 인력 확보가 중요하니 기업 밀집 지역에서 시작하는 거죠.” 판교는 이미 공간이 다 차고 임대료도 강남급으로 오르면서 최근에는 송파구 문정동으로 바이오기업들이 모인다고 한다. 역시 ‘남방한계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바이오는 스타트업에서도 가장 뜨거운 분야다. 2019년 바이오·의료 분야 신규 투자는 1조1033억원(25.8%)으로 2년 연속 1위였다. 바이오 중소·벤처기업 2496개 중 경기 665개, 서울 519개, 인천 67개로 수도권이 절반에 달했다. 바이오산업 메카인 대전은 206개, 충북 179개, 충남 111개였다.
개발자 구하기 어려워
본사는 대구에 둬도
영업이나 개발은 서울서 해야 하나 고민
지방 창업의 아쉬운 점‘기회의 격차’
지난 8월 중소벤처기업부의 ‘K-바이오 랩허브’ 후보지로 대전과 충북 등을 제치고 인천 송도가 선정되면서 균형발전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전은 정부출연연구기관과 카이스트 등 연구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이라 충격이 컸다. 대전 바이오산업을 선도한 LG화학(LG생명과학)이 서울 마곡으로 옮기면서 인력 유출이 있던 터라 고민은 깊어지게 됐다.
지방에서도 ‘판교’가 나올 수 있을까
중기부는 지난 8월 스타트업 육성 전략을 담은 ‘중소기업 창업지원계획(2021~2023년)’을 내놨다. ‘제2벤처붐’이라고 할 만한 창업 열기를 성과로 잇기 위해 만든 최초의 법정계획이다. 이 계획에서도 수도권 집중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기술창업 현황을 보면 수도권은 2016년 11만254개(57.8%)에서 2020년 14만3135개(62.5%)로, 비수도권은 2016년 8만420개(42.2%)에서 2020년 8만5814개(37.5%)로 격차가 벌어졌다. 이장훈 중기부 창업정책총괄과 서기관은 “제조업 일자리는 정부 보조금 지원 등으로 성과를 만들 수 있지만, 스타트업은 민간의 혁신이 전제”라며 “정부가 펀드를 만들고 기반시설을 지원하는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2013년 무렵 ‘4차 산업’이라는 대도시 지향의 혁신산업이 본격 등장하면서 수도권이 급성장했다”며 “고학력·고임금·고부가가치 일자리가 강남과 판교에 집중되면서 청년들의 수도권 쏠림 현상이 심화됐고, 비수도권은 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지방 스타트업의 요람은 창조경제혁신센터다. 박근혜 정권 당시 대기업과 17개 시·도를 짝지어 지역별 전문 산업을 육성하도록 한 정책이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 출범한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는 삼성전자의 협력으로 옛 제일모직 대구공장 터에 조성됐다. 삼성전자 사내 벤처 프로그램 C랩 등 지원체계가 잘 갖춰진 곳으로 평가된다. 과거 정치인들의 단골 방문지가 서문시장이었다면, 최근에는 여야 가리지 않고 센터를 방문한다.
주기중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창업지원본부장(48)은 “지역의 기성 산업과 스타트업의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부품, 지능형 기계, 섬유기계 등이다. “원가·공기 절감 등 기존 산업을 고도화하는 스타트업을 육성해 시너지를 내는 것이죠. 서울에서 제조 창업은 어렵잖아요. 제조 기반도 없고 제품 쌓아놓을 야적장도 없지만 대구라면 주차장을 비워서라도 쌓아줄 겁니다. 설계부터 양산까지 지원 플랫폼을 구축해 기업들이 서울 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 겁니다.”
여기도 가장 큰 고민거리는 사람이다. “경북대 등 지역 거점대학 졸업생들도 삼성에 취업하거나 서울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센터에서 육성한 헬스케어 스타트업 온빛은 이런 악조건과 싸우며 성장해왔다. 2017년 창업한 박재식 온빛 대표(32)는 병원 방문 없이 모바일로 증명서를 발급받고 실손보험 청구까지 가능한 ‘메디메디’ 앱을 개발했다. “증명서만 받으면 될 일인데 병원에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크잖아요. 병원마다 전산시스템이 달라 하나의 앱으로 연동하기 어려웠는데 우회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병원판 배달의민족’을 꿈꾼다는 메디메디를 도입한 병원은 200곳이 넘는다. 서비스를 확장해야 할 단계에 이르고 보니 서울에 사무실을 내야 할지 고민이 커지고 있다. “제가 직접 개발을 배워 헤쳐왔는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개발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본사는 대구에 두더라도 영업이든 개발이든 서울에서 뭐라도 해야 하나 싶어요.” 지방에서 창업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아쉬움을 묻자 ‘기회의 격차’라는 답이 돌아왔다. “생태계 자체가 작죠. 강이나 바다에 풀어놓으면 먹을 게 많은데 좁은 연못은 아무래도 적잖아요.”
수도권의 글로벌 경쟁력이 세계 최고라는 찬사가 나올수록 비수도권의 박탈감은 깊어진다. 지방에서도 ‘판교’, ‘네카라쿠배당토’가 나올 수 있을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해봐요. 정부가 지방에서 창업하면 1인당 1억원을 준다든지, 직원들 살 집을 준다든지…. 근데 그렇게 한들 바뀌겠어요?”
센터 너머에는 삼성상회 건물과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동상이 서 있다. 도로명 주소도 호암로 51. 대기업 유치와 개발사업에 매달리는 지방의 열망이 센터를 둘러보는 동안 어렴풋이 이해됐다. 기업은 자꾸만 수도권으로 떠나가고, 도심에도 빈집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나오는 절박함일 것이다. 동상을 바라보는 동안 ‘경제정의’라는 익숙한 관념과 ‘지역불균형의 부정의’라는 낯선 단어가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1100606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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