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안에 겁도 없이 뛰어든 ‘김수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70년대 후반기부터 맹렬히 퍼부어진 이 비난의 소리가 김수근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수근도 그 생전에 이 프로젝트를 한 것을 대단히 후회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연보에는 세운상가 설계에 관한 것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6월호에 이같이 적었다. ‘세계 제일’로 불릴 정도의 초대형 건축 프로젝트이자,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세운상가(1967년 준공)를 향한 날 선 비판이었다. 그의 말대로 세운상가엔 김수근의 꿈과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배어있다.
/ 고성민 기자
◇슬럼화된 전쟁의 상흔… 박정희-김현옥-김수근의 개발 무대로
세운상가의 역사를 보려면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부지는 당시 소개공지대(전쟁 중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 놓는 공간)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10일, 미국이 도쿄 대공습을 펼친다. 이날 도쿄 면적의 약 40%가 불탔다. 8만여명이 사망하고 100만여명이 이재민이 됐다. 조선총독부는 직후 서울, 부산, 평양 등 도심지 곳곳을 소개공지대로 지정하고 해당 지역 건물 철거에 나섰다. 세운상가 부지는 이때 너비 50m, 길이 약 1km에 걸쳐 소개공지대로 지정됐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이 땅은 이재민 판자촌으로 슬럼화됐다. 이곳 사창가는 ‘종삼(鐘三)’으로 불리는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1968년 10월 12일 조선일보는 “난공불락의 윤락가이며 서울의 불명예스런 명물의 하나로 손꼽히던 이른바 종삼 지대”라면서 “20여년간 탕아들의 유락장이자 우범 청소년들의 소굴이었던 도심지의 불결한 치부”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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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촬영된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 세운상가 부지 판잣집이 철거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치부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은 서울중구청 이을삼 계장(6급)의 행정연구서에서 시작했다. 세운상가 프로젝트와 비교하면 규모가 절반 정도였다. 50m 가로 가운데 양쪽 15m에 건물을 짓고 중앙의 20m를 도로로 남기는 방안이었다. 이 보고서를 받은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은 즉시 현장을 답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이 큰 관심을 가지며 사업이 확 커졌다. 손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5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1966년 7월 26일)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 시장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강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좀 더 깊이 연구해서 소신껏 잘 처리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자주 시찰하고 다녔으니 이 지대의 실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보였던 대통령의 깊은 관심이 김현옥 시장을 미치게 한다. 그때부터 이 사업은 구청 소관에서 시 본청 소관 업무로 바뀌게 되었고… (중략) 이 지구에 상가 건물을 짓는 일을 전담하는 기구가 (서울시에) 생겼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이 남긴 상흔과도 같은 땅에 국내 최대 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로써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당시 ‘세계 제일’의 건축 사업으로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조국 근대화 열망을 가진 박정희와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유명한 김현옥,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이렇게 만났다. 1966년 10월, 재개발지구 고시(건설부고시 2819호)가 이뤄지며 세운상가는 서울 도심부 최초의 재개발지구 사업으로 첫발을 뗐다.
◇획기적인 공중보행 설계…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김현옥 시장이 찾은 사람은 당시(1966년) 만 35세인 김수근 건축가였다. 김수근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인 28세 때 남산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며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고, 30세 때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창설하고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로 취임하는 등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34세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도 맡고 있었다. 당시 김수근의 제자이며 세운상가 설계에 참여한 현(現) 한국건축가협회 윤승중 명예회장은 월간 ‘건축’ 1994년 7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세운상가 계획이 처음 거론된 것은 1966년 어느날 당시 시장, 부시장에게 꽤 신용을 갖고 있었던 김수근 선생에게 시장이 문제의 땅의 이용 방법을 물어 왔을 때, 즉석에서 보행자몰, 보행자데크, 입체도시 등의 개념을 그럴듯하게 말로 설명하고, 시장, 부시장의 공감을 얻어내어서 프로젝트화한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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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17일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이 세운상가 준공식에서 준공 테이프를 끊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김수근은 이 건물에 건축 이상을 적극 반영했다. 핵심은 차도와 보행로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지상은 차도와 주차장으로만 구성하고, 2~4층을 상가로 구성한 뒤 건물 8개동의 3층 레벨이 모두 보행로로 연결되게끔 설계했다. 종로3가에서 남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총 1㎞ 길이의 초대형 보행 쇼핑몰을 계획한 것이다. 또 상가의 옥상이자 주거 부분이 시작하는 지상 5층에는 인공대지를 만들고자 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인 프랑스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의 영향을 받은 입체도시 설계였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현실에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핵심인 지상 3층 부분 공중보행로는 8개동이 모두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단절됐다. 현대·대림·풍전·신풍·삼원·삼풍 등 6개 기업과 아세아상가번영회, 청계상가주식회사까지 총 8개 사업체가 8개 건물을 각각 자금을 들여 시공, 분양하며 건물 3층 부분을 모두 잇는다는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 1층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조성되지 않고 상가가 들어섰으며, 인공대지와 아트리움 계획도 변경됐다.
건축계에선 이런 점을 지적했다. 손정목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6월호에서 ▲서울의 시가지는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데 세운상가는 남북 방향으로 길쭉하게 지어져 도시의 선(線)을 차단하며 ▲남북방향의 보행자와 차량이 많지 않아 보차도분리 발상이 처음부터 잘못됐고 ▲지상 7.5m에 해당하는 3층 부분에 보행로가 만들어져, 보행자가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여론은 1994년 2월 17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건축 관련 종사자 200여명은 당시 최고 국내 건축가로 김수근(39.6%)을, 최고 현대건축물로 김수근의 ‘공간 사옥’을 꼽았다. 반면 세운상가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현대건축물로 꼽았다.
◇선망의 대상에서 10년 만 애물단지로… 철거에서 재생으로 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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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26일 촬영된 세운상가 내부 점포의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전체화면 버튼을 클릭하면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김수근의 건축 이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미완의 공간이었지만, 세운상가는 압도적인 크기로 준공 직후부터 서울의 명물을 차지했다. 1967~1972년 순차로 8~17층 7개동이 준공됐고, 1981년 마지막 1개동(풍전호텔)이 지어졌다. 총 2000여개 점포와 851가구, 177개의 호텔 객실이 세워졌다. 1967년 준공식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직접 참석해 준공 테이프를 끊었으며,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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