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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만 잘 살면 안 된다" 87년 대선후보 '단골 장소' 사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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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2동 세입자들의 주거권 쟁취 투쟁 사당2동과 사당3동은 1980년대 주택 재개발 과정에서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는 세입자들의 투쟁이 격렬했던 대표적인 곳이었다. '장기융자 임대주택'을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사당소식 제3호>, 사당2동 세입자 대책위, 1988. 6. 10) ⓒ 사당2동 세입자 대책위
88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의 도시 재개발 사업과 사당동
1980년대 서울에서의 재개발과 강제 철거문제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전두환 군사정권이 주민 편의는 뒷전에 둔 채 도시미관 만을 고려해 추진한 개발 정책의 산물이었다.
특히 1983년 발표된 목동 신시가지 개발 계획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새로운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목동 철거민들의 운동은 그동안의 산발적 판잣집 철거 반대시위에서 벗어나 도시빈민들의 높아진 사회의식을 보여준다. 목동 세입자들은 개발 이익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서울시 측에 정당하게 주장하고 나선 첫 사례였다.
초기의 가옥주 중심 투쟁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점차 세입자 문제를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 목동 철거민 운동은 ①자발적인 주민조직에 의한 활동이었다는 점, ②주민 스스로가 서울시와 직접 교섭을 벌인 점, ③집 소유주만이 아니라 세입자들이 공동으로 대항한 점, ④진정서 제출과 농성 등 다각적인 대응방식을 채택한 점, ⑤사회운동단체와 종교단체 등과의 연계를 적극 도모했던 점 등에서 이전의 철거민 운동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여줬다. 목동 철거민 운동은 아파트 입주권과 임대아파트 보장 등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남겼다.
사당3동 산 22번지 일대의 재개발 계획은 1981년 10월에 처음 발표됐다. 18평형 504가구의 아파트를 짓겠다는 이 계획은 1년 후에 준공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지역주민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460여 가구 중 250여 가구의 지역주민들은 이미 700만 원이 들어가는 14평형 연립주택을 짓겠다고 추진위원회까지 구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1000만 원짜리 18평형 아파트로 둔갑돼 발표되자 철거를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럼에도 동작구청은 철거반원과 기동경찰 등 1600여 명을 동원해 강제 철거를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명이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이주할 데가 없는 철거민들이 대부분 현장에서 노숙을 하며 버티자 비난에 직면한 동작구청은 결국 철거민들을 다시 수용하기 위한 천막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당2동의 경우는 이미 1973년 12월에 재개발지구로 지정됐지만,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1984년에 재개발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됐다. 이후 본격적인 부동산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200여 개의 부동산중개소가 들어섰는가 하면 투기꾼들이 대거 몰려 들었다. 이에 따라 1985년 500여만 원에 불과하던 20평짜리 집 한 채가 1989년에는 5000~6000만 원을 호가하고 있을 정도였다.
2337가구로 구성된 재개발조합의 조합원 가운데 1988년까지 남아 있는 원주민은 15%인 300여 세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전부 외지인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사당동 세입자들, 이곳 저곳 세입자들의 '주거권 보장' 호소
▲ 정부의 재개발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언론보도 기사(<동아일보>, 1987. 3. 4) 당시 언론은 정부의 '대책없는' 재개발 정책을 피판하면서 사당동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언급했다. 위 기사에 등장하는 사진도 사당2동 철거촌의 모습이다. ⓒ 동아일보
쫓겨날 위기에 몰린 사당동 세입자들도 1985년부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당3동 산 24번지(가마니골)에 살던 세입자 700여 명은 그해 4월 4일 삼광교회(사당3동)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산 24번지'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을 발간하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결집시켜 나갔다.
이들은 서울시와 동작구청, 국회,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 등을 방문해 '세입자 대책 없는 재개발 반대' 등을 호소했지만, 현실의 벽은 단단하고 높기만 했다.
1985년 10월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지역구 국회의원 허청일 의원(민정당) 사무실을 방문해 "세입자 대책 없이는 재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선거공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허청일 의원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면담이 이뤄지지 않자 주민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는데, 면담에 응한 허청일 의원이 "내가 언제 그런 공약을 했느냐"면서 화를 내고 나간 직후 경찰에 의해 곧바로 강제 해산을 당해야 했다.
같은 해 11월 8일 어렵게 성사된 서울시장과의 면담에서는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가 돈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혜택을 줄 수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는 능력대로 사는 것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없는 대로 그 수준에 맞는 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좋은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 달 쯤 후에는 도시재개발에 대한 석사논문 자료를 준비하던 S대 대학원생(도시공학 전공) 김아무개씨가 사당동 철거지역에서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84년부터 사당동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몇 차례 자료조사와 설문조사를 하던 그는 사글세방(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만 원)을 구해놓고 논문 준비를 하던 중 학문의 현실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논문 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을 택하겠다"는 말을 남긴 후 사당3동 동사무소 앞에서 주민 30여 명과 함께 '대책 없는 철거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가담했다.
당시 언론은 경찰이 김아무개씨를 연행하려고 하자 한 통의 라이터 기름을 몸에 뿌리고 "분신자살 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소란을 피우다 "이럴 수밖에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사당동 철거지역, 1987년 대선 후보들이 찾는 단골 장소가 되다
사당동은 1987년에 이르면 6월 민주항쟁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관철되면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대선 후보들이 도시빈민정책을 내세우며 찾는 단골 장소가 됐다.
10월 3일에는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사당3동에서 벌어진 서울시철거민협의회가 주최하는 '빈민대동제'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총재는 도시빈민정책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굿판을 관람한 후 사당2동으로 옮겨가 "민간민선정부가 들어서면 군사독재정권이 전경대 육성·최루탄 구입 등 정권유지를 위해 쏟아 넣었던 '정권유지비' 전액을 모두 철거민 구호에 돌려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해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은 김영삼 총재보다 19일 정도 늦은 10월 22일 사당동을 찾았다. 김대중 고문은 사당2동 세입자대책위에서 민통련(민주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통해 초청했는데, 사당동 철거민촌을 들러 150여 명의 철거민 등이 모인 자리에서 "부자만 잘 사는 철거는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정부는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자신의 도시빈민정책을 알리는 연설을 한 후 사당 시장에 들러 주민들을 만나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당3동 산 24번지에서는 YS와 DJ의 방문을 전후한 시기에 철거반원에 의한 세입자 폭행사건이 벌어져 20여 명의 철거민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심지어 이를 취재하던 경향신문 이아무개 기자가 주택조합원들에게 한때 감금당한 채 폭행당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보통 큰 선거를 앞두고는 강제철거도 일시 중단하는 게 상례인데, 이 당시 사당동에서는 취재기자마저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으니 강제 철거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치열한 3년간의 싸움 끝에 사당3동 산24번지 세입자대책위는 대선 직전 이주비 300만 원 지급과 공공임대 아파트 건설 약속을 받아내는 선에서 합의하면서 먼저 투쟁을 마무리했다. 이후 그 자리에는 대림아파트가 들어섰다.
사당3동 세입자들의 합의와 사당2동 세입자들의 계속되는 투쟁
하지만 사당3동 산24번지 세입자들의 합의가 있었고, 그해 대선에서 사당동 철거지역을 방문한 김영삼·김대중 후보는 낙선하고 사당동을 방문하지 않은 노태우 후보가 오히려 당선되는 이변(?)이 있었음에도 사당2동 세입자들은 매주 월요일 총회를 개최하면서 철거 싸움을 다음해에도 계속 이어갔다.
이 시기 사당2동에서는 1987년 12월 27일 뒷집 축대가 무너져 내려 6세의 한 어린이(임채의)가 압사당하는 사고도 있었고, "사당동은 또 하나의 광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거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하면서 많은 주민이 다치는 일도 속출했다.
1988년에 들어 사당2동 세입자들은 '재개발 반대 및 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도시빈민 대회'(1/31), '대보름 맞이 사당빈민 대동제'(3/3)를 연이어 개최한 후, 5월 14일에는 세입자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4통 공터에서 '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사당주민 단합대회'를 개최해 "현 재개발정책은 도시빈민 세입자의 생존권을 말살하는 것이므로 정부는 도시빈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인 '장기융자 임대주택'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정부가 직전에 내놓은 보증금 300만 원의 세입자 특별분양 아파트(7평)에 대해서도 방이 하나에 불과해 서너 명의 가족이 함께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정책"이라며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세입자들은 13평 이상(방 2칸)에 보증금 없는 월 5만 원 수준의 임대주택을 요구했다.
1988년 6월 14일 사당2동 세입자 300여 명은 동작구청에서 세입자 대책 마련을 요구하면서 농성한 후 사당동까지 행진하여 돌아오기도 하면서 동작구청을 압박했다. 이어 11월 1일부터는 동작구청 앞에서 장기 저리 임대주택 제공과 동작구청장 면담 등을 요구하면서 300여 명이 무기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동작구청은 경찰을 동원하여 농성 중인 사당2동 세입자들을 경찰차에 태워 난지도 쓰레기처리장에 내려놓기까지 했다.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사당동 철거싸움
▲ 사당동 세입자들의 '주거권 뵤장'을 요구하는 국회앞 집회 장면 1988년 11월 11일 이현재 당시 국무총리는 담화를 발표하여 사당동 철거민 사태를 언급하면서 강력 대응을 해당 부처에 주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당동 철거 문제는 이제 지역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이에 사당동 철거민들도 11월 17일 국회 앞에서 다른 지역 철거민들과 함께 주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한다. ⓒ 동아일보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사당동에 다시 강제철거의 바람이 분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11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사당2동 재개발지구에서 우성건설 등 3개 건설업체가 고용한 철거반원 800여 명의 강제 철거가 시작됐고, 이를 막던 세입자들은 철거반원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한 명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4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취재 중이던 중앙일보 기자가 철거반원들로부터 무선전화기를 빼앗기고 야구방망이로 구타당해 앞니가 부러지는 등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하는 일도 함께 발생했다.
철거반원들의 폭력사태가 계속되자 세입자들은 경찰에 병력출동을 요청하지만, 관악경찰서는 "재개발조합 측과 세입자간의 일이므로 관여할 성질이 못 된다"면서 출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사당2동 세입자들은 이수역 앞 도로를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이면서 항의하는가 하면, 8일에는 사당동 철거민 200여 명이 서총련 소속 대학생 500여 명과 연합하여 철거 현장과 인근 도로에서 4시간 동안 '강제철거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며 항의했다. 이날 대학생들은 인근 총신대에서 먼저 '사당동 강제철거 반대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후문을 빠져나가 사당동 철거 현장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농성을 벌이다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이에 11월 11일, 이현재 당시 국무총리는 담화를 발표하여 사당동 철거민 사태를 언급하면서 강력 대응을 해당 부처에 주문하는 일까지 벌였다. 사당동 철거 문제는 이제 지역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사로 비화되고 있었다.
사당동 철거민들도 11월 17일 국회 앞에서 다른 지역 철거민들과 함께 주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이때 이철용 의원(평민당)이 국회 예결위원회 회의에서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정부차원의 사당동 철거민 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발언을 했고, 이를 둘러싸고 정회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내몰려 잠을 자고 있어도 정부는 대책 하나 세워놓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를 질타한 이철용 의원은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산도 짜는 것 아니냐!"고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이에 집권 여당인 민정당 의원들이 예결위 위원장에게 '의제 외 발언'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11월 20일에는 조은(동국대 교수)과 조옥라(서강대 교수)가 사당2동 지역의 재개발 과정에 대한 실태 조사를 기반으로 '재개발사업이 지역주민에게 미친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두 교수의 연구활동은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아 1986년 6월부터 원래 1년 예정으로 사당동에 기거하면서 이뤄졌는데, 철거 일정이 거듭 늦춰지면서 이들의 연구 기간도 2년 반으로 길어지면서 1988년 11월에야 발표할 수 있었다. 이들의 독특한 연구 활동은 추진 과정에서 오해를 사 간첩 신고도 세 차례나 당했다고 한다.
주거권 실현 투쟁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낸 사당동 철거싸움
▲ 사당동철거촌의 대학생 빈활 소식을 전하고 있는 언론보도 기사(한겨레신문) 1989년 1월 서총련 대학생 2백여 명은 사당동에서 빈민 활동을 집단적으로 벌인다. 그동안 농촌활동이나 공장활동은 빈번했지만, 대학생들이 집단적 빈민 활동을 벌인 것은 1989년의 사당동이 처음이었다. ⓒ 한겨레신문
1989년 1월 서총련 대학생 200여 명은 사당동에서 빈민 활동을 집단적으로 벌인다. 그동안 농촌활동이나 공장활동은 있었지만, 대학생들이 벌인 집단적 빈민 활동은 1989년의 사당동이 처음이었다.
대학생들은 철거지역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따르릉 따르릉 전화 왔어요/ 강제철거 나왔다는 전화 왔어요/ 우리 동네 꼬마들 단결했어요…"와 같은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도 보급하고, 사당2동 지역의 진정한 주인은 이곳을 가꾸어온 철거민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는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 왔네/ 남성시장을 휘휘 돌아 집으로 올라오니/ 아름다웠던 우리 동넨…"과 같은 '터' 노가바도 함께 만들어낸다.
1989년 4월에는 사당2동 세입자대책위 집행부가 그동안 반대해오던 "방 1칸(7평) 특별분양권을 조합 측이 1300만 원에 구입하고 세입자는 자진 이주하"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세입자 간 갈등이 표출되는 일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입자들은 다시 '장기임대주택 보장'이라는 요구로 세입자 대책위를 정비하면서 또다시 강제철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대책위를 정비한 지 불과 한 달 후, 강제철거가 강행된다는 소식에 89번 버스종점 앞에서 서울대생 150여 명이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지만, 철거반원들에 의해 빈집 200여 채가 철거당한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지면서 세입자 10여 명이 다치고 세입자 3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밤 10시 10분께 사당2동 재개발세입자 100여 명과 중앙대생 등 서총련 남부지구 대학생 200여 명이 "살인철거 중단하고 임대주택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이수 전철역 근처에서 시위를 벌여 약 30분간 이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로 연행된 지역 주민과 대학생도 49명에 달했다.
같은 해 8월 9일, 동작구청은 경찰 12개 중대 1500명, 구청직원 200여 명 및 철거반원 600여 명 등 3000여 명을 동원하여 사당2동 재개발지역 가옥 347채 중 299채에 대한 강제철거에 또다시 나섰다. 이날도 세입자와 철거반원 간에 격렬한 몸싸움이 일어났고, 세입자 6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에 숭실대생 10여 명이 동작구청에 몰려가 강제철거에 항의하며 3층 구청장실 바깥벽에 화염병 3개를 던지고 달아나기도 했다.
이렇듯 장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된 사당동 철거반대 투쟁은 세입자들이 요구한 '장기임대주택 보장'을 쟁취해내는 성과를 내지는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말았다.
하지만 세입자 특별 분양권 보장과 특별 분양권에 대한 340여만 원에 상당하는 전매보상책을 추가로 받는 등 일정한 성과를 남겼고, 이후 '장기임대주택' 또는 '영구임대주택'과 같은 세입자들의 요구가 주거권 실현의 유력한 방도로 일반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자만 잘 살면 안 된다" 87년 대선후보 '단골 장소' 사당동 - 오마이뉴스 모바일 (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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