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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사무실 둔 농업법인들… 수백억 땅 사고 농사 안 지어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빅토리아오피스텔과 삼흥빌딩은 농업회사법인, 영농조합법인 등 농업법인의 실태를 보여주는 곳이다. 2016~2020년 이곳에 소재한 농업법인 7곳은 경기도 땅 20만5600㎡, 107개 필지를 사들였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에 토지 취득 신고를 하면서 기입한 회사 주소지에서 농업법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농업회사법인 7곳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업무용 빌딩(왼쪽부터)과 그 회사 가운데 한 곳이 보유한 경기도 평택 소재 논이다. 4월 중순이지만 경작 흔적은 없고 잡초가 자라있다./ 조귀동·허지윤 기자
지난해 평택시 현덕면에서 땅을 산 농업법인이 위치한 곳에는 암호화폐로 된 자체 ‘코인’으로 포커·사이버경마·로또 등을 한다는 업체가 들어서 있다.

서울 테헤란로 일대에는 OO뱅크, OO에셋, OO시티란 상호를 단 농업법인들이 다수 존재한다. 같은 오피스텔의 한 사무실에 두 곳의 농업법인이 위치하기도 했다. 2개 층을 쓰는 법률사무소의 3층과 4층에 따로 농업법인이 있다고 신고한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테헤란로의 농업법인이 갖고 있는 평택 일대 땅을 취재한 결과, 다수의 토지에서 경작이 이뤄지고 있지 않았다.

15일 조선비즈가 찾아간 평택시 안중읍 덕우리의 땅이 대표적이다. 토지 용도가 전(田)이고, 보전관리지역으로 묶인 이곳은 임야 한가운데 위치한 맹지라 아예 진입조차 할 수 없었다. 옆에서 농사를 짓던 60대 여성이 "저기 산인데? 들어가지도 못하는 곳"이라며 "저길 농사를 짓겠다며 샀다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곳은 테헤란로 소재 농업법인이 지난 2017년 매입한 곳이다.

 
농업법인 A사가 2017년 매입한 평택시 안중읍 덕우리 토지 일대 전경. 해당 토지 앞으로는 파밭 등 농지가 있지만, 이 회사가 사들인 땅에서는 농사를 지은 흔적은 볼 수 없었다. /평택=허지윤 기자
여기서 차량으로 15분 거리인 안중리의 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 벼를 심었다 베어내고 남은 뿌리 부분이 말라 죽어 있고, 그 사이로 풀이 듬성듬성 자라있었다.

인근에서 만난 50대 남성 "4월 이맘때면 여기처럼 밭갈이 작업을 해야 하는 건데, 저기는 밭갈이도 안 하고 잡초가 나 있는 거잖아" "농사지을 생각이 없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곳은 또 다른 테헤란로 소재 농업법인이 2019년 매입했다. "지난해 저 땅을 매입한 외지인들이 내 땅도 팔라고 지금도 거칠게 요구하고 있다"며 "반협박에 가까운 행동이 이어져 난감할 지경"이라는 게 이 남성의 설명이다.

 
그래픽=김란희
◇ 허위로 서류 작성해 토지 취득하자마자 팔아

농업법인은 농업 경쟁력 제고와 대규모 기업농 육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농민들이 공동으로 창업하거나 아니면 외부 투자를 받아 농업법인을 만들면, 해당 법인에 현재 농민들이 받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세제 및 금융 지원 혜택을 준다는 게 골자다. 취득세 등이 대폭 감면되고,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에 따른 농지 매매 규제에도 자유롭다. 금융 혜택도 받는다.

그런데 제도의 허술함을 악용해 농업법인을 땅 투기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빈번하다. 몇 년 전부터 이 문제가 지적돼왔고, 정부도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지만, 농업법인 운영 실태를 보면 ‘공염불’에 가깝다.

조선비즈는 김형동 의원실(국민의힘)로부터 2016~2020년 농업법인의 경기도 소재 토지 취득 기록 전부를 입수해 분석했다. 해당 기간에 1780개 농업법인이 6493건의 토지를 매입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매입 면적은 11.9㎢로 서울 여의도 면적(2.9㎢)의 4.1배에 달한다. 이 자료에는 농업법인명과 법인 소재지, 취득목적 등의 정보가 함께 있다. 이를 기반으로 다수 농업법인의 사업보고서와 법인등기를 확보해 분석했다.

 
농업법인 B사가 2017년 매입한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덕우리.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없었고, 나무들만 우거져 있었다. /평택=허지윤 기자
분석 결과 노골적으로 농업 경영이 아니라 부동산 투자를 목적으로 한 법인들이 다수 발견됐다. 서울 소재 55개 농업법인 가운데 18개 법인이 부동산 매매업, 부동산 임대업, 부동산 개발업 등을 사업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농지의 매매·임대·관리업, 주말농장의 분양 및 관리업을 영위하겠다고 신고한 농업법인도 많았다.

아예 회사 명칭에서부터 OO경매정보, OOO경매, OO토건, OO투자건설, OO개발, OO에셋 등 토지 매매가 주업임을 드러내는 곳도 다수였다. 또 이들의 경우 실제로 토지 매매가 활발했다.

부산의 한 농업법인은 2020년 3월 31일 안성시 도기동의 논(답) 3935㎡를 사들였다. 매입 직후 여기서 661㎡를 분할한 뒤, 지분 매각 형태로 9명에게 판매했다.

지난해 2월 감사원이 평택시에 ‘비목적사업 영위 농업법인 관리 부적정’이라는 제목으로 통보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전남 목포 소재 농업법인 등 4곳은 2017~2019년 농업경영계획서를 허위로 작성해 농지를 취득하고 나서 1년도 안 돼 해당 토지를 매각한 것이 드러났다. 보유 기간은 가장 짧은 것이 7일, 가장 긴 것이 8개월에 불과했다.

◇ 신도시 토지 390억원 사들인 회사 매출은 ‘0’

아예 농사를 짓지 않아 매출이 없는 농업법인도 다수였다. 농업법인 중 자산이 120억원 이상으로 외부감사법인에 해당하는 곳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다.

충북 천안시 소재 농업법인은 지난해 기준으로 387억원 상당의 토지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지난해 수원시 권선구 탑동 일대에서 5개 필지 6만8400㎡의 토지를 매입했다. 이곳은 권선구청 바로 옆 토지로, 최근 아파트 단지와 산업단지가 개발된 지역이다.

 
하지만 지난해와 2019년 매출은 전혀 없었다. 모회사인 건설사 등으로부터 부채 340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어 이자만 나가는 구조다.

경기도 평택의 또 다른 회사는 306억원 규모의 자산을 갖고 있는데, 매출은 2억7000만원에 불과했다. 광명 시흥·남양주 왕숙·하남 교산 등 신도시 인근 토지를 지난 1~2년 집중적으로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 한 회사의 경우 지난해 매출은 1800만원이었는데, 자산은 180억원에 달했다.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회계사)는 "300억짜리 자산을 가진 회사의 매출이 2억원 정도면 정상적인 회사라고 볼 수 없다"며 "사업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토지가격 상승 등을 노리고 만든 법인이라는 얘기다.

◇ 개발 예정지 토지 매입 집중… 평택시 압도적

농업법인들이 매입한 토지들은 신도시, 산업단지 등 개발 예정지에 집중돼 있었다. 전체 토지 취득 6470여건 가운데 26.0%인 1690건이 평택시에 몰려 있는 게 대표적이다. 평택시의 매매 면적은 345만㎡로 전체 토지 매입(1190만㎡)의 29.0%에 달한다. 평택에서도 현덕면(590건), 안중읍(280건), 오성면(230건), 팽성읍(140건)에 많았다.

 
그다음으로 농업법인의 토지 매입이 활발한 지역은 화성시로 870필지(13.4%), 119만㎡(10.0%)에 달했다. 안성시(670건·10.3%), 포천시(570건·8.8%), 이천시(410건·6.3%), 여주시(390건·6.4%), 파주시(380건·5.8%), 용인시(370건·5.6%) 등에서도 토지 매입이 몰렸다. 경기도 내 농업법인 토지 취득 가운데 82.3%가 이들 8개 시군에서 이뤄졌다.

고준석 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기업들이 많이 들어오고, 그에 따라 개발이 이뤄지는 곳에서 집중적인 
 

토지 매입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겸임교수는 "매입 지역, 매입 전후 행태 등을 따져보았을 때 기획부동산이 활동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김형동 의원은 "농업법인이란 외피를 둘러싼 땅 투기 세력이 경기도 내 개발 호재를 등에 업고 활개를 친 것"이라며 "농업법인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규제 제도를 시급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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