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의 제너릴일렉트릭(GE)이 창립자 토머스 에디슨의 발명품이자 회사의 상징인 조명 사업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GE는 경영계의 전설로 불리는 고(故) 잭 웰치 전 회장의 진두지휘 하에 한때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렸지만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결국 독이 됐다. 실적이 악화 되면서 GE의 상징과도 같은 사업들이 하나씩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GE는 과거 한국 부동산 금융 시장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129년 전통의 조명 사업을 매각하면서 GE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때 한국 부동산 시장의 큰손으로 활약했던 GE의 한국 부동산 투자 역사를 다시 한번 조명해보고자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부동산에 투자한 'GE'
GE가 한국 부동산 시장에 투자를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부터다. IMF 이후 한국의 자산 가격이 크게 하락하면서 로담코·모건스탠리·론스타·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투자자들이 한국 부동산 투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던 때다. GE는 2001년 한국에 ‘GE리얼에스테이트코리아’라는 부동사투자회사를 설립했다. GE의 금융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GE캐피탈이 100% 출자한 회사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외부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지 않고 자체 자금만으로 투자를 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회사 내 보유 자금도 충분하고 당시 GE의 신용등급이 트리플A라 저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곡물 기업인 카길도 GE와 같이 회사 내 보유자금을 활용해서 한국 부동산에 투자하기 위해 법인을 설립한 바 있다. 다만 GE와 달리 카길은 한국 부동산 투자 시장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밸류애드' 전략으로 총 투자자산 100여개, 누적 투자규모 2조원에 달해
당시 GE의 주된 투자 전략은 ‘밸류애드’였다. 투자자가 많고 경쟁이 치열해 가격이 비싼 코어 에셋(Core asset) 보다는 경쟁이 덜한 B급 빌딩에 주로 투자하면서 중위험·중수익을 추구하는 전략이었다. 실제 2002년 첫 투자가 여의도 신송센터빌딩과 충정로 디오센터인데 두 건물 모두 일반적으로 투자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구분 소유 형태의 건물이었다. 이어 2003년에는 현재 국민연금의 충정로 사옥으로 쓰이고 있는 옛 케이원리트빌딩을 인수했으며, 이후 서초동의 옛 논노빌딩, 을지로에 있는 내외빌딩에도 투자했다. 또한 2005년부터는 STS개발과 함께 홈플러스 개발에 같이 참여해 6개의 자산을 인수하기도 했다. 또한 지분 투자뿐만 아니라 부동산 PF와 부동산담보대출에도 참여했다. GE가 한국에 투자한 부동산은 100개가 넘었으며, 누적 투자 규모는 2조원에 달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격탄 맞아 서서히 축소, 2014년 한국서 철수
이처럼 한국 부동산금융 시장을 주름잡던 GE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서서히 몸집을 줄이기 시작한다. GE가 한국 부동산에 처음 투자를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전부 자체 자금을 가지고 투자를 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산가격이 폭락하면서 그룹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GE캐피탈 때문에 GE의 주가도 많이 떨어졌다. 이에 GE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투자에서 점차 발을 빼기 시작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시 GE리얼에스테이트코리아는 그간 쌓은 실적과 인프라, 평판을 바탕으로 2008년 9월에 ‘GE자산관리코리아’라는 리츠 자산관리회사(AMC) 인가를 받아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GE는 이후에도 수년간 한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계속하다가 2014년 완전히 한국에서 철수했다.
부동산금융 업계의 큰 축으로 활약하는 GE 출신들
한국 부동산금융 시장에서 GE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GE의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 GE 출신들이 현재 부동산금융 업계 곳곳에서 자리를 잡아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범 당시 GE는 3명으로 시작했다. GE리얼에스테이트코리아의 초대 대표를 맡았던 최영욱 전 삼성자산운용 부동산총괄 전무를 비롯해 코람코자산운용 대표·싱가포르투자청(GIC) 한국대표를 역임한 박래익 그레이프 대표가 초창기 멤버로 합류해 투자를 총괄했다. 박 대표는 당시 GE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 “MIT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후 부동산 투자 업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며 “당시는 GE가 지금의 구글과 같은 회사였고 부동산투자회사였기 때문에 건설사보다 하는 업무도 매력적이고 연봉도 높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박 대표는 2006년부터 2013년까지 GE리얼에스테이트코리아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GE는 회사가 한창 성장하던 2007~2008년께 인원이 총 30여명 규모로 늘었다. 당시 GE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신동훈 이지스자산운용 자산관리(AM)부문 대표, 권준영 롯데 AMC 대표, 김현수 국민연금 부동산투자실장, 윤정규 이지스자산운용 해외투자본부장, 오승택 액티스 상무 등이 GE 출신이다. 또한 이호길 전 아센다스코리아 대표, 최경태 전 KT에스테이트 부사장 등이 GE에 있었다. GE 출신들은 지금도 분기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는 등 부동산금융 업계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GE 출신들은 GE에서 단순히 부동산 투자 역량을 키운 것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의 일원으로 근무하면서 배운 것들이 향후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 대표는 “임원들에 대한 트레이닝이 체계적이고 매니저로서 좋은 리더가 갖춰야 할 리더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한때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혁신의 아이콘
문어발식 다각화가 부메랑되어 몰락의 길로
GE는 1878년 에디슨이 설립한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출발했다. 이후 1892년 발전기와 전등을 만들던 톰슨 휴스턴과 합병해 지금의 GE가 탄생했으며, 이후 수차례 혁신적인 기술들과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 사용된 기술(1906년)을 비롯해 토스터·전기레인지·냉장고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또한 1912년 컴퓨터의 핵심 기술이었던 진공관을 선보였으며, 1913년에 개발한 X선 관 덕분에 질병 치료에 X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전 세계인의 일상을 크게 바꿔 놓은 기술과 제품들을 개발했다.
특히 지난 3월 타계한 고(故) 잭 웰치 회장은 GE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1981년부터 2001년까지 20년간 GE를 이끌며 1,000개에 달하는 기업을 인수하는 등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GE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웠다. 웰치 전 회장이 GE를 이끌던 20년 동안 매출은 4배 이상 증가했고, 시가총액은 26배 정도 커졌다. 웰치 전 회장이 적용한 대표적인 경영 방식으로는 ‘식스 시그마’가 있다. 식스 시그마는 100만 개의 제품 중 3~4개의 불량만을 허용하는 품질 혁신 운동으로 웰치 전 회장은 1996년부터 식스 시그마 도입을 선언하고 전사에 적용했다. GE는 식스 시그마 도입으로 1999년 20억달러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뒀다. 이 같은 탁월한 실적 덕에 웰치 전 회장은 ‘세기의 경영자(Manager of the Centry)’, ‘경영의 교과서’라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직원을 해고해 ‘중성자탄 잭(Neutron Jack)’이라는 악명도 가지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웰치 전 회장의 진두지휘 하에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던 GE는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웰치 전 회장이 이끈 다각화와 문어발식 확장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GE는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처음 만들어진 1896년부터 편입된 원년 멤버였으나 2018년 6월 다우지수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당했다. 또한 2018년 3·4분기에는 주가가 10년래 최저수준으로 떨어지고 실적이 악화되면서 분기 배당금을 단 1센트만 지급해 투자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이처럼 계속해서 추락하던 GE는 결국 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조명 사업마저 내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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